사회복지

한국 현대 사회복지의 시초

쏜라이프 2021. 10. 2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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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복지학계에서는 외원단체들의 사역을 한국 현대 사회복지의 시초로 보고 있다. 이렇게 6.25 직후 외원 기독교 구호기관들은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고난 당한 이들을 돌봤다. 본보는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쟁 고아를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는 단체 중 홀트아동복지회, 월드비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등 설립 초기 감동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고아들에게 가정을 선물해준 홀트아동복지회

 



1954년 미국 오리건주의 작은 도시 크레스웰에서 목재 회사를 운영하던 50세의 해리 홀트는 한 고등학교 강당에서 '아메라시안 한국 고아'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들에 관한 내용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를 본 해리 홀트는 부인 버사 홀트와 함께 한국의 전쟁고아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홀트 부부는 이미 6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는 식구 수대로 8명의 한국고아들을 입양하기로 했는데 8명의 아이들을 입양하기 위해서는 한 가정에 2명까지만 입양을 허용했던 당시 미국 난민구호법을 바꾸어야만 했다. 홀트 부부는 이를 위해 의회 앞에서 캠페인을 벌였고 미국의회에 '홀트법안'이라고 명명된 '특정 전쟁고아들의 구제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아이들 입양에 나섰다.

 



홀트 부부가 한국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입국한 것은 1955년. 그는 8명의 고아를 입양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모든 아이들이 가정에서 보호받고 교육받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재단법인 홀트양자회를 설립하고, 경기도 고양에 일산원을 세웠다.



 

기독교 관점에서 아동을 돌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1938년 미국인 J. 칼빗 클라크 목사는 중국의 고아들을 돕고 열악한 아동들의 복지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중화아동복리회(CCF, China Children's Fund, 이하 CCF)를 만들어 후원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클라크 목사는 아시아의 다른 빈곤국가를 찾던 중 당시 CCF 극동사업본부장이었던 밀스 목사의 요청에 따라 1948년 한국 지원을 결정했다. CCF 의 한국지원이 시작된 1948년 10월 15일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창립일이다.

1948년 해방 직후 어려웠던 한국 아동들을 위해 CCF는 서울구세군후생학원, 서울구세군혜천원, 절제소녀관 등 3개 시설에 있는 400명의 아동을 도우며 시작됐다. 시설 아동의 대부분은 북한에서 탈출한 피난민 자녀로, 거리를 떠돌다 시설에 수용돼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고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CCF의 고아지원사업은 한국에 초점을 맞춰 모든 지원을 하게 됐으며, 196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약 3 만명의 아이들을 도왔다.

이와 함께 중국의 공산화로 지원 사업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된 CCF는 'China Children's Fund'에서 Christian Children's Fund로 이름을 변경하고 한국지원을 본격화했다.


 

 

 

고아와 미망인, 장애인 돌본 월드비전

 




밥 피어스 목사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부흥집회 설교를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남대문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하고 1만 달러의 원호금을 한국교회에 전해주었고, 이듬해 5월에는 한경직 목사와 만나 영락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기도 했다.

 

 


밥 피어스 목사가 프랭크 필립 박사와 함께 월드비전을 설립한 것은 그해 9월. 전쟁 중인 한국에 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그는 그해 10월 종군기자로 자진해서 한국을 다시 방문해 한경직 목사와 함께 피난민 구호사업을 시작했다.

 

 


영화제작자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 한국전쟁과 고아들의 영상을 담아 기록영화를 제작해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밥 피어스목사는 전쟁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난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1951년 백선육아원과 다비다모자원을 비롯한 구호시설들을 세웠다. 전쟁 후반기에는 한국인 여성과 외국 군인 사이에 태어난 아동들이 버림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위한 일시보호소도 세워 지원했다.

 

 

 

 


1953년에는 정식으로 서울 종로 연지동 장로교선교부 사무실을 얻어 '한국선명회(현 한국월드비전의 전신)'라는 이름의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열었다. 초대이사장은 한경직 목사, 중국에서 40년 동안 선교사역을 한 어윈 레이츠목사가 초대회장을 맡았다.

 

 

 

 

 

[출처 : 표현모,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도 느끼게 하소서“ 한국기독공보.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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